— 가토파르디스모와 디지털 혁명 속 생존의 미학
서문: 팔레르모의 무도회와 실리콘밸리의 알고리즘
1860년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어느 저택에서 열린 무도회를 상상해보자.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 군단이 섬을 휩쓸고 있는 동안, 살리나 공작과 그의 동료들은 여전히 왈츠를 추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춤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춤의 리듬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을.
2024년, 우리는 다른 종류의 혁명 한복판에 서 있다. 이번엔 붉은 셔츠 대신 알고리즘이, 대포 대신 신경망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질문이 우리를 괴롭힌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제3의 길이 있는 것인가?
1. 가토파르디스모: 변화를 통한 보존의 변증법
주제페 토마지 디 람페두사의 『표범』에서 탄크레디가 외친 그 유명한 역설 — “Se vogliamo che tutto rimanga com’è, bisogna che tutto cambi”(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한다면,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 — 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이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다.
가토파르디스모는 정치학자들이 명명한 이 개념은, 표면적 변화를 통해 구조적 연속성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과도 닮아있다. 테제(기존 질서)와 안티테제(혁명적 변화) 사이에서 진정한 종합(Synthese)을 찾아내는 것. 단순히 옛것을 고수하는 것도, 맹목적으로 새것을 따르는 것도 아닌, 변화 속에서 본질을 보존하는 고도의 정치적 지혜.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보여준 중세 수도원의 도서관처럼, 가장 보수적인 공간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유가 탄생하기도 한다. 가토파르디스모는 바로 이런 역설의 미학이다.
2. 디지털 리소르지멘토: AI 혁명의 정치학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인 리소르지멘토가 그랬듯, 오늘날의 AI 혁명도 단순한 기술적 변화가 아니다. 이는 인식론적, 존재론적 전환이다. 데카르트 이후 서구 문명을 지배해온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패러다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생각할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인간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만큼이나 근본적인 전환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듯, 이제 인간도 지능의 유일한 주체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가토파르디스모적 사유가 필요하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이 결국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밀어냈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선사했듯이, AI 혁명도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과정일 수 있다.
3. 도구와 주인: 하이데거의 도구존재론과 AI
마르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도구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했다. 망치는 단순히 물리적 객체가 아니라, 인간의 “염려”(Sorge)와 “기투”(Entwurf)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망치를 사용할 때, 우리는 망치를 “의식”하지 않는다. 망치는 우리의 손의 연장이 되어, “준비된 상태”(Zuhandenheit)로 존재한다.
AI 도구들도 마찬가지다. ChatGPT나 Midjourney를 사용할 때, 처음에는 이들을 별개의 “존재자”(Seiende)로 인식한다. 하지만 점차 이들은 우리의 사유와 창작의 연장이 된다. 타자기가 작가의 사유를 확장했듯이, AI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확장하는 “준비된 도구”가 되어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주인과 도구의 관계를 명확히 유지하는 것이다. 도구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AI는 인간의 “실존적 기투”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4. 베냐민의 아우라와 디지털 복제시대
발터 베냐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기계적 복제가 예술의 “아우라”(Aura)를 파괴한다고 진단했다. 오리지널만이 갖는 독특한 현존성과 권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냐민은 동시에 이것이 새로운 가능성도 연다고 봤다. 예술이 제의적 기능에서 해방되어 정치적, 교육적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AI 시대의 창작도 마찬가지다. AI가 생성한 텍스트나 이미지는 전통적 의미의 “아우라”를 갖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형태의 창작 가능성을 연다. 누구나 시인이, 화가가, 작곡가가 될 수 있는 시대. 창작의 민주화.
여기서 다시 가토파르디스모적 사유가 필요하다. 전통적 창작자의 권위를 지키려면, 오히려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순수한 손작업을 고집하는 것은 산업혁명 시대에 러다이트(Luddite) 운동을 벌였던 직조공들의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5. 푸코의 지식-권력과 AI 거버넌스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이 분리불가능하다고 봤다. 근대적 주체는 “규율권력”(pouvoir disciplinaire)에 의해 형성된다. 병원, 학교, 감옥 같은 제도들이 정상/비정상을 나누고, 개인을 특정한 방식으로 주체화한다.
AI 시대에는 어떤 새로운 형태의 주체화가 일어날까?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예측하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안다고 주장할 때,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다.
가토파르디스모적 관점에서 보면, 이 새로운 권력 형태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자율성을 확보하는 전략이 더 현실적이다. AI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자본”(부르디외)이 되고 있다.
6. 에코의 기호학과 AI의 의미작용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을 통해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는지 탐구했다. 모든 문화 현상은 기호 체계 안에서 작동한다. 중요한 것은 기호와 대상의 관계가 자연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의미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AI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GPT가 생성하는 텍스트는 기존 인간 언어의 패턴을 학습한 결과다. 하지만 이것이 “가짜” 의미라는 뜻은 아니다. 에코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의미는 어차피 “가짜”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의미 작용이다.
따라서 AI와의 소통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진짜 이해”를 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고 받을 수 있는가다. 이는 번역의 문제와도 비슷하다. 에코가 「완벽한 언어를 찾아서」에서 보여줬듯,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번역은 가능하고 필요하다.
7. 실천적 가토파르디스모: AI 시대의 생존 전략
이론적 논의를 실천으로 옮겨보자. 『표범』의 살리나 공작이 취한 전략을 현재 상황에 적용하면:
첫째, 거부하지 말고 선점하라. 공작은 가리발디를 적으로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카 탄크레디를 그의 부대에 보냈다. 마찬가지로 AI를 적대시하지 말고, 먼저 배우고 활용하라.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추격은 어려워진다.
둘째, 형식을 바꿔 본질을 지켜라. 공작은 귀족의 특권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부르주아 질서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재정의했다. AI 시대에도 인간의 고유한 가치 — 창의성, 공감능력, 윤리적 판단력 — 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를 발휘하는 방식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셋째, 동맹을 맺어라. 공작의 딸 콘체타가 부르주아 집안과 결혼하듯, 우리도 AI 도구들과 “결혼”해야 한다. 이는 굴복이 아니라 전략적 제휴다.
넷째, 시간을 활용하라. 『표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시간 의식이다. 공작은 변화의 리듬을 읽을 줄 안다. 너무 빨리 움직이면 기회주의자가 되고, 너무 늦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 AI 학습도 마찬가지다. 조급하게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점진적으로 적응하라.
8. 미래의 표범들
조르주 바타이유는 인간을 “결여하는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항상 무언가 부족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추구한다. AI는 이 결여를 채워줄 수 있을까?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결여를 만들어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AI는 우리의 인지적 한계를 확장해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불안과 결여를 만들어낸다. “AI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콤플렉스, 기계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실존적 불안.
하지만 이것도 가토파르디스모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불안을 감추려 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인간적 특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AI가 완벽할수록, 불완전한 인간성이 더 소중해질 수 있다.
현대적 재해석: 넷플릭스의 『표범』이 던지는 질문
2025년 3월, 넷플릭스는 『표범』을 새롭게 각색한 드라마 시리즈를 공개했다. 톰 샨클랜드, 주세페 카포톤디, 라우라 루케티가 공동 연출한 이 작품은 루키노 비스콘티의 1963년 영화 이후 두 번째 영상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현대적 재해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알랭 들롱이 연기했던 탄크레디를 사울 나니가,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안젤리카를 데바 카셀이 맡은 이 새로운 버전은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다. 그것은 21세기의 관점에서 가토파르디스모를 다시 질문하는 것이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자체가 이미 가토파르디스모적 존재다. 전통적인 방송과 영화관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여전히 서사와 영상의 본질적 힘을 보존한다. 『표범』이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동시에 배포되는 것 자체가, 귀족 문화가 대중 문화가 되는 가토파르디스모적 전환의 완벽한 은유다.
데바 카셀은 자신의 역할 준비에 대해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이전 연기보다는 감독들의 현재적 비전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이는 바로 우리가 AI 시대에 취해야 할 자세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현재의 맥락에서 새로운 해석을 찾아내는 것.
결론: 변화 속의 영원
에코는 『전날의 섬』에서 시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시간은 나선형으로 흐른다. 같은 지점을 지나는 것 같지만, 매번 다른 높이에서 지난다.” AI 혁명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또 다른 도구 혁명을 겪고 있지만, 이번에는 다른 차원에서다.
『표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라. 늙은 공작은 죽어가지만, 그의 지혜는 새로운 시대로 이어진다. 가토파르디스모는 개인의 생존 전략을 넘어, 문명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넷플릭스의 새로운 『표범』은 이 지혜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표범이 되어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는, 유연하면서도 우아한 존재. 그래서 우리의 후손들이 돌아볼 때, “그들은 어떻게 그 격변의 시대를 그토록 우아하게 헤쳐나갔을까?”라고 감탄할 수 있도록.
결국 가장 혁명적인 것은 혁명을 혁명답게 만들지 않는 것이다. 변화를 일상으로, 혁신을 전통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가토파르디스모의 미학이다.
팔레르모의 무도회는 끝났지만, 춤은 계속된다. 다만 이제는 다른 음악에 맞춰서.